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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당신의 운명을 대신 살아드립니다

백서편집장 2025. 4. 1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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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아들의 기억을 찾아서

비 오는 오후,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었다.
우산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조용한 서점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 운명을 대신 살아주는 곳 맞나요?”

그의 손에는 낡은 흑백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사진 속 소년은 오래된 운동화를 신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제 아들입니다.
정확히 27년 전, 마지막으로 본 날이에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조심스럽게 운명 교환권을 내밀었다.

“그날을 다시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당신이 대신, 그 아이의 마지막 하루를 살아줄 수 있을까요?”

 

카드에 손을 얹은 순간,
눈앞이 흐릿해지고
나는 좁은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거칠게 숨을 쉬며 누군가의 시선을 피해 달아나는 중이었다.

이건… 아들의 시선이었다.
몸이 작고, 신발은 헐었으며,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그날,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늘 폭언을 일삼던 아버지,
무력하게 울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던 고양이 한 마리.

소년은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사라지는 게 더 나은 사람이었을까…”

그 한마디가 가슴 깊이 박혔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서점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 아이는 마지막까지… 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의 사진을 쓸어내렸다.

“당신이 대신 살아준 덕분에,
그 애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얼마나 조용히 포기했는지…
이제라도 알아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나는 기억을 하나 잃었다.
그게 어떤 기억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왼손 약지에 작은 흉터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꿈속에서
소년이 고양이를 안고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제 외롭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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