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구석, 오래된 서가 아래서 낡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진한 자주색 밀랍으로 봉인된 그 봉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의 운명을 대신 살아드립니다. 단, 대가가 필요합니다."
처음엔 장난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봉투 안엔 운명 교환권이라 적힌 카드를 포함해 짧은 설명서가 동봉돼 있었다.
“이 카드를 소지한 자는, 다른 이의 운명을 대신 살아줄 수 있습니다.
대신 하나의 기억을 잃게 됩니다.”
나는 그저 웃어 넘겼다. 그런 게 세상에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 그날 밤.
익명의 발신자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제 운명을 대신 살아주세요. 하루만.”
그리고 익숙한 이름 하나가 덧붙여져 있었다.
서하.
내가 단 한 번도 잊지 못한 사람.
그녀는 내 첫사랑이었고,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꿈을 쫓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만남에서 그녀는 울며 말했다.
"나는 내 운명이 너무 무서워."
그 후로 그녀와의 연락은 끊겼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녀의 운명을 대신 살아달라는 걸까?
나는 카드에 손을 얹었다.
무언가 뜨겁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낯선 병실 침대 위였다.
이름표엔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의사는 말했다.
"오늘이 수술날입니다. 많이 무서우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누군가의 인생 한 조각이 내 안에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녀의 하루를 살았다.
겁에 질린 채 수술대에 누웠고,
희미하게 깨어난 뒤, 창밖에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하야, 너 참 용기 있었구나."
다시 나로 돌아왔을 때,
나는 하나의 기억을 잃고 있었다.
서하와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여전히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책상 위엔 또 다른 봉투가 남겨져 있었다.
“고마워요. 이제야 나도 내 운명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아래, 그녀의 서명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당신의 운명을 대신 살아주는 일.
그건 누군가의 공포를 감싸 안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하루를 통해 나의 오래된 슬픔 하나를 놓아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