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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당신의 운명을 대신 살아드립니다.

백서편집장 2025. 4. 12.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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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아이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서점 문이 조용히 열리고,
젖은 운동화를 신은 작은 아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서가 앞에 조용히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엔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저는, 엄마가 저를 사랑했던 그날을… 다시 살고 싶어요.”

 

나는 말없이 그 아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혹은 얼마나 아팠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운명 교환권이 손끝을 스치고,
눈을 뜨자 나는 작은 몸을 하고 있었다.
낮은 시선, 무거운 책가방, 그리고 작고 떨리는 심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방에 있는 여자가 돌아봤다.
그녀는, 아이의 엄마였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반찬했어.”

 

작은 식탁에 마주 앉아
말없이 밥을 먹었다.
아이는,
아니 ‘나는’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기에

숟가락을 쥔 손이 자꾸 떨렸다.

“엄마, 나 좋아해?”

“…그럼, 세상에서 제일 많이.”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온 세상이 고요해졌다.

그 하루는,
짧고도 길었다.
말을 아끼는 엄마와,
그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아이.

그리고 창밖엔,
그날의 비가 조용히 멈추고 있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날의 느낌… 다 기억나요.
그런데 이제 그걸… 다시 잊는 거겠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아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기억은 잊혀져도, 마음엔 남을 테니까요.”

 

그는 조용히 봉투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

 

나는 그날,
자신의 이름을 적은 첫 공책의 기억을 잃었다.
그 공책 속엔
어릴 적 나만의 이야기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지만
이제는 내용도, 제목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이상하게도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꿈을
며칠 동안 계속 꾸게 되었다.

그 꿈속에서 나는,
늘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엄마가 널 정말 사랑했단다. 그건 절대 사라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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