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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당신의 운명을 대신 살아드립니다.

백서편집장 2025. 4. 12.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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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피하고 싶은 여자

서점에는 유난히 햇살이 따사롭던 오후였다.
조용히 문을 연 여자는 말없이 서가를 둘러보다가
손끝으로 조심스레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별이 예정된 여행이에요.
전 그 마지막 날을 견딜 자신이 없어요.
대신, 다녀와 주시겠어요?”

 

그녀의 눈가엔 아직 말하지 못한 안녕이 맺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운명 교환권에 손을 얹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바다 근처 작은 민박에 서 있었다.
그녀의 몸으로, 그녀의 시선으로.
그리고 앞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안에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연습해 온 대사처럼.

우리는 함께 걷고, 바다를 보고,
저녁엔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그는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네.”
“그동안 즐거웠어.
너와 함께한 시간들은, 진짜였어.”

 

나는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이런 말을 들을 자신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나를 보냈던 거겠지.

 

밤, 바다 앞에서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도 이별을 원했나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난 그냥, 네가 먼저 떠날 줄 알았어.
그게 더 쉬울 줄 알았지.”

 

그 순간,
내가 대신 살고 있는 이 하루가
누군가에겐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서점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그 사람, 뭐라고 했나요?”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너와 함께한 시간들은, 진짜였어.”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그럼, 저… 다시 돌아가도 될까요?”

 

나는 하나의 기억을 잃었다.
아주 오래 전에 했던 첫 이별의 기억이었다.
그 이별이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때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는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았던 감촉이
따뜻하게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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